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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 최진석

공삼일구 Overman 2023. 4. 1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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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터 임팩트가 강했습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작가님은 이 책을 전 국민이 읽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어떤 경지에 있어야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자신감이 있을지, 모든 문장이 저에게 깊은 생각을 갖게 하는 훌륭한 시간이자 대화였습니다. 정말 전국민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커버

질문이 많으면 선진국, 대답이 많으면 후진국

이 말은 제가 아이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모습이지만, 저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저도 작가님의 말처럼 철학의 문구를 가지고 좋다고 철학을 좋아한다고 떠들었지. 참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럼 철학이란?

본질에 접근하여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철학,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를 답습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는 말에 깊게 공감할 수 있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레고의 사례 '아아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제가 좋아하는 최고의 브랜드 레고가 위기를 극복한 것도 철학적 사유의 결과라는 말에도 깊이 공감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가? 아닌, 아이들에게 역할의 놀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며 하이라이트한 글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다.


자신의 삶을 철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기성의 철학 이론으로만 삶을 채우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삶을 철학적으로 살려는 도전보다는 천 년이 두 번 이상이나 지난 지금도 공자나 노자처럼 살려 하고, 플라톤이나 니체를 살려내려 한다. 자기 자신도 버리고, 자신의 역사도 버린다. 자기를 플라톤화, 마르크스화, 공자화, 노자화하려 하지, 플라톤 등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철학화하지 못하고, 정해진 철학을 이념화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평가한다.


구체적인 현장이 펼쳐지고 나서 윤리가 있다. 주도권을 가진 선진국에서는 다 그렇다. 거친 야성이 먼저 있고 나서야 순하고 질서 잡힌 행위가 요청된다. 드론 시장을 윤리(규제)가 필요할 정도로 키워놓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을 윤리적(규제적)으로 다루다가 드론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당연히 짐승처럼 과감하게 덤비는 것이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실속 있다. 짐승처럼 덤비면 짐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인간이 된다. 너무 인간적이면 자잘한 인간으로 남는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기 위해 마음속에 야수를 한 마리 키우자.


남들이 벌여놓은 판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물 틈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일은 이제 지겹다. 우리는 정말 우리 나름대로의 판을 벌여보는 전략적인 시도를 할 수 없을까? 선도력을 가져볼 수 없을까? 그 질문에 철학적인 높이에서 답해보려는 시도가 바로 이 책이다.


선도력은 팔뚝이나 허벅지의 근육에서 나오는 힘과 다르다. 그것은 지성적이고 문화적이며 인문적이며 철학적이고도 예술적인 높이의 시선에서 형성된다. 인격적인 토양에서 터져 나오는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발휘하여 용기 있게 도전한 결과다.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높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런 시대의식을 각성하고, 나와 함께 이 사명을 감당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정도로만 살다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돈이 자본으로 바뀌고, 부자가 자본가로 바뀌어야 한다. 백성이 시민으로 바뀌어야 한다.

돈, 부자, 백성이 자본, 자본가, 시민으로 바뀐다는 것은 사적인 범위 안에 갇혀 있는 시선을 깨고 나와 역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책임성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오황택 이사장님은 바로 이런 점에서 성숙한 자본가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단계 상승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실상 선진국 차원으로 상승하는 일이다. 이제부터 계속 이야기하겠지만 선진국 차원으로 한 단계 상승한다는 것을 거칠게 이야기하면 철학적, 지성적, 문화적, 예술적 차원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단계 위로의 상승, 그 힘찬 도약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차원들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목표를 알아야 분명한 전진이 가능할 테고 그 분명한 전진을 위한 확실한 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각각 다른 내용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철학적인 높이의 사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통상 우리는 어떤 하나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이론 체계나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만 묻고 따지는데,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야 각기 다르더라도 그런 내용을 산출하는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철학적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비유하면, 전략적 차원에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의 움직임에 종속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을 수입하며 살았다. 능동적이거나 주체적이라기보다 종속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가 쌓은 경제적인 부도 결국은 큰 틀에서 보면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그 시선이 인문적 시선이고 철학적 시선이고 문화적 시선이며 예술적 시선이다. 이 높이에서는 기능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도전할 수 있다. 이 차원의 시선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야만 ‘따라하기’가 선도하기로 바뀌고, 훈고의 습관이 창의의 기풍으로 바뀔 수 있다.

새로운 원료와 새로운 시장을 찾는 이 무력적인 강제 활동들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국주의의 팽창이다. 토인비가 산업혁명이 완성된 해를 1840년으로 보았는데, 바로 그 1840년에 아편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치욕으로만 여기고 또 일본을 증오하기만 했다. 지금껏 그 치욕을 되갚아주려는 장기적이고 차분한 준비는 없었다. 나는 임진왜란을 당한 것도 치욕이지만, 더 큰 치욕은 이것을 되갚아줄 어떤 시도도 구체적으로 행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본다. 사실상 복수전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스스로에게 묻는 더 큰 치욕이어야 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우리의 정력을 일본을 증오하는 일에만 바쳤는가? 아니면 일본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더 바쳤는가?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일본에게 왜 당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다시는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인지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새로운 힘을 모아야 한다. 감정적으로 일본을 증오하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제대로 된 자세일 것이다.

일본을 이기려는 길로 가지 않고 다시 패배하는 길로 가서는 절대 안 된다. 이렇게 하여 두 나라의 힘이 같아진다면 오히려 일본의 침략 야욕을 잠재우고 진정한 선린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나아갈 당당한 길이다.

평화와 용서도 이 극복과 복수의 정신 위에서 행해져야 의미가 있다. 이런 정신도 없이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 평화를 구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인들 입장에서 왜 서양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장 구체적으로 대포와 군함이 떠올랐다. 대포와 군함에 당했으니까 이를 가져야 되겠다 싶어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한다. 양무운동은 이렇게 약 30년 동안 진행되었다.

이런 높이에서 하는 결정이나 선택이 바로 철학적인 시선이다.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지배할 더 높은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철학적 시선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미국식의 산업 생산 구조를 갖게 된다.

실용주의는 추상적이거나 궁극적 관념이 갖는 권위를 반대한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독일 관념론이 보장하는 지배력을 부정한다. 실용주의 철학과 함께 미국은 비로소 미국적 독립을 완성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미국식의 민주주의에 사상적 기초를 확보했고, 이로써 추상적 관념보다는 능률을 중시하는 미국식의 기풍을 형성한다.

보통 어느 하나의 철학적 내용에 몰두해서 그것이 철학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빠지기 쉬운데, 우리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적 차원의 시선이다. 그리고 철학적 차원의 시선에서 철학적으로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끌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이자 철학적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미국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다른 말로 하면 전략적인 차원에서 상당히 잘 형성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미국의 강한 국력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 강대함이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반면 그렇지 못하고 종속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나라,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전술적인 움직임만 보이는 나라들은 강대한 나라를 만들지 못한다. 이런 나라들은 당연히 철학적인 차원에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 이 단계에서 철학을 쉽게 얘기해본다면, 아마 ‘전략적인 높이에서 하는 사고’ 정도가 될 것이다. 전략적 단계는 전술적 단계를 지배한다. 전술적인 단계보다는 전략적인 단계가 더 높다. 높을 뿐만 아니라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짜진 판 안에서 사는 전술적인 사고와 달리,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이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종속적인 변수들을 다루면서 하는 행동들을 전술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높이로 상승한 단계의 사람들은 어떠할까? 바로 전면적인 부정을 이야기한다. 전면적인 부정이 새로운 생성을 기약한다. 새로운 생성은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여는 일이다.

종속적인 삶을 사는 한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의 삶을 꾸리거나 효과적으로 사회를 관리하지 못한다.

아무튼 그때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지금까지 선진국이고, 후진국이었던 나라는 지금까지 후진국(중진국)이다. 왜 그런가? 선진국은 선진국을 유지할 시선의 높이에서 운영되고, 후진국(중진국)은 후진국(중진국)적 시선의 높이에서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기가 그렇게 어렵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시선을 교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틈새를 놓치고 우리가 주도권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또 몇 백 년을 더 종속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경제적으로 더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좀 더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형성하는 일을 말한다.


우리를 비독립적이라고 말할 때, 제3세계 종속이론 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여러 방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살아왔거나 살고 있는 삶의 대부분이 ‘따라하기’라는 것만으로도 그 종속성을 말할 수 있다. 결국 생각의 차원에서 종속적이었다. 철학적으로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불편함을 극복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주도권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보다는 일본이 그것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의 대응은 전략적인 높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아베의 움직임에 도덕적인 가치 판단만 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물론 이런 대응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의 대응은 그저 피상적이거나 대증적이거나 전술적인 대응일 뿐이라는 것이다.


심리적 기대나 특정한 이념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런 순진함과 피상성은 피할 수 없다. 사실 지금 우리도 아직 이 정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그는 유학적 도덕주의로 세계를 해석해버리는 피상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나의 관점으로만 세계를 해석해버리는 단순함 말이다. 조선을 비판하는 일이나 조선의 앞길에 대해 선견지명을 발휘하는 일에는 능력을 보였지만, 넓은 틀 속에서 당시 세계의 전략적 움직임까지는 판단할 능력이 안 됐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다산식의 이런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사실 이 문제는 여기서 이렇게 단순하게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훨씬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전문적인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나 침략이 도덕적인 선악의 차원에 있는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하게는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들의 발생이나 억제를 자기 통제하에 둘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실패와 성공의 판 자체를 자기가 주도했느냐 상대가 주도했느냐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아베의 행동을 보고도 “그는 나쁘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역사적 반성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 “진실은 결국 승리한다”와 같이 다분히 감정적이거나 도덕적인 판단 아래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침략을 당했던 일이나 지배를 당했던 일에 대해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또 큰 목소리로 이런 식의 반응만 해놓고는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비굴한 대응일 뿐이다. 비굴한 대응이 습관화되면,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패배자로 남기 십상이다. 혹시 우리는 이런 대응 방식을 아직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닐까? 여전히 전술적인 높이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베의 움직임을 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아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일본이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을 판단하고 그 판단 아래에서 우리의 대응 방안을 고민하는 것, 동아시아나 세계정세 속에서 아베 행위의 위치를 점검하고 대응하는 것, 이것들이 중요하다. 아베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욕하고 성토하는 것 말고,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이제는 더 높은 차원의 전략적인 판단과 실질적인 대응을 하는 일이 필요하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지식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해서 재사용하거나 거기에 몰두하고 빠져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하거나 효용성을 따지는 대신 그 지식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따지고, 그것이 세계 안에서 벌이는 작동과 활동성을 보려고 한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둘 중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컴퓨터가 발명되자 어떤 사람은 그 컴퓨터를 사용하고 소유하는 일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컴퓨터의 사용보다도 그 컴퓨터로 인해 전개될 새로운 변화의 맥락이나 달라질 사회의 흐름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역시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철학적이라는 것은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는 일 철학적인 시선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를 짚어보자. 철학적 시선이라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지성적인 차원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시선이다.


언어의 구체적인 사용이나 삶의 다양한 형태들을 훌쩍 뛰어넘어 삶이나 언어 자체를 들여다보는 높이로 시선이 상승하는 것을 우리는 철학적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특히 철학 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는 경각심을 가지고 숙고해야 할 내용이다.


레고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덴마크의 한 컨설팅 회사를 찾아간다. 이 회사는 고객이 가져온 문제를 철학적인 문제로 바꾸어서 접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레고는 원래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었는데, 그 컨설팅 회사의 조언에 따라 기존 질문을 다음과 같은 철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아이들에게 놀이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질문과 ‘아이들은 왜 놀까’라는 질문 사이에 존재하는 시선의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은 철학 수입국으로서의 우리는 자칫 철학서에 들어 있는 외국 철학자들의 이론을 숙지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철학적 지식을 갖는 일과 철학적 시선을 발휘하는 일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철학적인 지식에 익숙해지는 단계를 넘어서서 스스로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지성이 한 발짝 한 발짝 상승해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아도 되는 그곳, 거기에 철학이 살고 있다.

그러니 생산국에 비해 효율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한쪽은 효율적으로 전진하고, 다른 한쪽은 비효율성을 계속 쌓아가다 보니 어떻게 해도 차이가 좁혀지기 힘들다.


이로써 스스로는 이론의 대행자로 존재하지, 자신을 둘러싼 구체적인 세계에서 문제를 발견하려는 호기심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살지 못한다. 이러다가 단절적인 개인 수양 속으로 쉽게 빠져들기도 한다.


모든 철학은 다 각기 그 시대를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담겨 있던 바람 소리나 시장의 소란이나 땀 냄새들은 모두 빼버리고 관념적인 논의나 도덕적인 주장들만 받아들여 교조적으로 내면화한다.


하지만 철학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철학적 지식,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기실 명사와 같은 쓰임을 갖고 있지만, 동사처럼 작동할 때만 철학이다.


새로운 ‘장르’를 시작하는 나라가 선진국


행복, 인의, 자유, 사랑과 같은 덕목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의 높이가 바로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단계다.


이 높은 단계의 시선은 그 시선을 가진 것 자체로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실현되면서 구체적인 성취를 이뤄낼 가능성이 크기에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자연과학이나 국가의 부강함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상위의 힘이다.

중진국까지는 선진국의 선도력을 따라가거나 그 선도력을 확대 심화시키는 역할을 주로 한다. 그에 비해 선진국은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으로 세계를 선도하는데, 이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의 주요 자양분이 바로 철학적 시선이다.

어떤 나라가 문화적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바로 장르를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한다. 장르를 만드는 나라는 문화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수입하는 나라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다.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그 힘으로 앞서나간다. 장르—선도력—선진은 이렇게 연결된다.


장르를 개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꿈’이다.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선진성 여부를 보여주듯이 각자 개인들은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독립적이냐 아니냐를 보여준다.


질문이 많으면 선진국, 대답이 많으면 후진국


호기심은 사실 이 세계의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은 자신만의 것으로, 매우 고유하고, 비밀스럽고, 사적인 내면의 활동이다. 호기심이 발동할 때, 즉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이 발동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정리하자면, 선진국 수준의 삶을 만드는 선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장르’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장르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질문’의 힘을 내면화하는 시민의식이다.

자동차 디자인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뀌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패턴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계속 꿈꿔보는 일, 이것이 ‘상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꿈꿔보다가 더 이상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고 판단하는 일, 이것이 ‘통찰’이다. 통찰이 일어나도록 새로운 빛을 향해 계속 나아가려는 의지를 ‘창의’라고 한다. 상상이나 창의도 아무 때나 나오지 않고 ‘지성’의 활동성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해야 비로소 발휘된다.

선진국에서는 바로 이런 창의와 상상이 도처에서 발휘된다. 질문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과 같다. 창의와 상상이 일어나는 높이에서 세계를 포착한 결과가 관념이고, 이는 ‘곡선’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된다. 선진국에서 ‘개념’을 포착하면 후진국에서는 그 ‘개념’을 수용한다. 그리고 선진국에서 ‘개념(관념)’을 구체화해서 장르를 만들면, 후진국은 그 장르를 채워준다. 선진국이 장르를 기반으로 해서 선도력을 행사하면, 후진국은 열심히 따라간다. 그래서 선진국은 선진하고 후진국은 뒤따른다. 따라서 선진국의 움직임은 전략적이지만, 후진국의 움직임은 전술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동선, 즉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파악한 다음에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해 감동을 생산해내고, 그 감동을 매개로 그것을 알게 해주려는 시도가 바로 문학이다. 사건들의 유기적 연관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해주려 하면 사학이 된다. 세계를 관념으로 포착하여 그 관념들의 유기적 연관을 통해서 알게 해주려는 노력, 바로 철학이다. 그것을 색으로 표현하면 미술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음악이 된다. 형상적인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알려주려는 시도가 바로 예술이다.


상상력이나 창의력도 아무 곳에서나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 상위 수준에서 예술가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칠 때 비로소 발휘된다

왜 그런가? 중진국 수준까지는 선진국에서 열어놓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선진국에서 포착한 ‘관념(개념)’을 따르고, 선진국에서 만든 장르를 채워주고, 선진국에서 발휘하는 선도력을 따라간다. 중진국까지의 수준은 있는 길을 가는 단계다. 이미 있는 이 길은 당연히 선진국에서 열어놓았다. 이렇듯 이미 있는 길을 가는 단계와 없는 길을 여는 단계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교체란 패러다임이 정해져 있는 조건 속에서라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발휘하는 시선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적 지식도 칸트의 것이든, 데카르트의 것이든, 헤겔의 것이든, 플라톤의 것이든, 우리한테는 유물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우리가 남겨진 철학적 지식들을 습득하는 일은 손가락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손가락의 지시를 따라 달을 보려는 것이다. 결국 자신만의 달을 가지는 일이다. 달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주장으로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만물의 근원이 물일까? 사실 만물의 근원이 정말로 물인지 아닌지는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탈레스가 이 주장을 한 바로 그 사건이 중요할 뿐이다. 탈레스의 주장이 ‘최초’라면 그것이 그 이전에 나온 주장들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탈레스가 물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그리스인들은 과연 만물의 근원을 무엇이라고 했겠는가? 바로 ‘신神’이었다.


그렇다. 철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인 이유는 인간 가운데 탈레스가 최초로 믿음에서 이탈하여 비교적 근본적이고도 높은 수준에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으로만 자기 삶을 채우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파하고, 대신해주는 삶밖에 살 수 없다. 이는 종속적인 삶이다. 종속적인 삶을 살아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가 바로 중진국 정도다.


이해 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가의 리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는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8


철학적인 높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다.

당시 어느 기자가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했다. “건명원이 성공할 것 같으냐, 성공하지 않을 것 같으냐?” 그 기자뿐만 아니라 건명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공 여부를 묻는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질문이다. 꿈과 이상이 있으면 그 꿈과 이상을 실천하고 시도하면 되는 것이지, 그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꿈은 있는 문법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일이다. 인류를 번영시키고 인류에게 큰 영감을 주는 창의적 성취를 이룬 영웅들이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시소를 탄 적이 있던가? 가능과 불가능을 면밀히 분석하며 우왕좌왕한 적이 있던가? 그들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고유한 욕망으로 자기 인생을 채우지 기존에 있는 문법이나 논리로 그것을 해석하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그냥 건너갈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분야에나 일류 비평가들과 일류 분석가들로 넘쳐난다. 제3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 각자가 책임성 있는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한다. 꿈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평이나 분석에 빠지는 제3자적 태도로는 주인으로 살 수 없다

지금은 일류 비평가나 일류 분석가보다도 이류라도 좋으니 1인칭 참여자들이 필요하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살다 가겠다는 의지로 뭉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바로 꿈을 꾸는 무모한 사람들 말이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공자가 한 생각의 결과들을 종합해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아마 이럴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말은 인간이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 넘어왔음을 뜻한다. 중국 역사로는 이것을 천명天命을 벗어나 도道의 세계로 넘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 등장하는 조짐과 신호를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민함이 있다. 이 예민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대응할 수 있고, 먼저 대응하니 앞서 나갈 수 있다.

집단에는 그런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개별과 보편, 개인과 집단, 개별자와 공동체 등으로 나누어놓고 저울질하다 보면 당연히 무게중심이 보편이나 집단이나 공동체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집단은 대개 ‘보편’이라는 탈을 쓴 이념의 지배를 받고, 그러면서 권위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이


반면 종속적인 사람에게는 질문보다 대답이 더 편하다. 질문은 집단에서 이탈하는 용기를 발휘할 때 가능하다.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집단에서 이탈하여 자기로 우뚝 설 수 있다. 독립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집단이 강제하는 일반적인 이념과의 자발적인 단절이고 고립이다. 우선은 ‘우리’에서 이탈해 ‘나’로 서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20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연결’, 그것은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는 창의적 활동


독립적 주체는 자신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단절’을 감행한다.


관찰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큰 사람은 관찰을 하고, 호기심이 작은 사람은 하지 못한다.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이다. 인생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하여 진실하게 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요한 관찰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몰입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아주 높은 단계다.  


천금도 큰돈이고 재상 자리도 높은 자리이긴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사용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제사용으로 쓰려는 소는 몇 년을 잘 먹여 키우죠. 그러니까 그 소는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삿날 당일에는 깨끗이 씻기고 비단 옷을 입혀 끌고 가죠. 이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소는 제사장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속으로 흐느낍니다. ‘내가 소로 태어나지 말 것을, 차라리 보잘것없는 돼지가 될 걸. 그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그러니 내게 그런 제안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그러고 나서 장자는 “더러운 진흙 구덩이에서 나 자신만의 즐거움을 택할지언정, 통치자에게 얽매이는 삶을 살지는 않겠다”고 일

철학적 사고는 분명히 전복적이다.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얌전하지 않다. 사고의 야성을 놓치지 않는다. 이미 있는 모든 것들에 답답해하고, 스스로 그것들과 불화를 빚는다. 이미 있는 모든 것들이 편안하고 좋아서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탁월한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창조적 탁월함은 기존의 것들을 불편하게 느끼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철학은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유하는 것

다른 사람이 해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자기 삶을 꾸리고 세계를 운용하는 것을 ‘훈고’라고 한다. 사실상 우리나라는 장기간에 걸쳐서 다른 사람이 해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왔다. 훈고적 삶이 아닐 수 없다. 말하기 싫지만 이제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껏 남의 것을 열심히 추종해서 모방하는 것으로 삶의 대부분을 채웠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이데올로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이데올로기, 건국(정부수립) 이후로는 미국의 이데올로기로 살았다. 주된 흐름은 대부분 이러했다. 이처럼 생각을 따라하다 보니 생각의 결과들도 대부분 따라서 한 것들로 남았다. 산업도 전반적으로 ‘따라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하기’를 잘해서 이른바 ‘재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지식의 습득보다 인격적 성숙은 난이도가 훨씬 높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난이도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리는 것도 선진국으로 올라서도록 해주는 대부분의 조건이 인격적 차원의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창의성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이다. 인격이라는 토양에서 튀어나온다. 삶의 깊이와 인격적 성숙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다.  

진정한 승리의 비결은 ‘태연자약’ 여기서 ‘태연자약’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태연자약에서 자약은 자기가 자기로만 되어 있음을 뜻한다. 태연은 아주 크고 넓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태연한 사람은 자약하고, 자약한 사람은 태연하다.


자신을 이겨야 진짜 강자


태연자약한 후타바야마의 ‘기세 없는 기세’에 눌려서 상대가 자멸하는 것이나, 나무 닭의 ‘온전한 덕’에 눌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버리는 것은 같은 일이다.

절대적 높이를 가진 자는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자기 업으로 삼지 않는다. 자기를 이기려 하지 타인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경쟁 구도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가지 않는다. 경쟁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그 구도 자체를 지배하거나 장악한다. 자기 게임을 할 뿐이다. 태연자약한 태도다. 그래서 자기가 애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멸함으로써 승리자의 지위를 오래 유지한다. 나무 닭이 그랬다. 그래서 노자도 “자신을 이겨야 진짜 강자다[自勝者强]”라고 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일등보다는 일류를 꿈꾸는 사람이다. 일등은 판을 지키는 사람이고, 일류는 새판을 짜는 사람이다. 우리가 따라하고 부러워하는 바로 그 단계다. 짜진 판 안에서 사는 데 만족하는 나라는 전술적 차원에 머무르고, 판을 짜보려고 몸부림치는 나라는 전략적 차원으로 상승한다. 전략적 차원에서라야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독립과 창의를 맛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결국 운전대를 잡으면 그렇게 신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로 사회가 채워져 있으면 모두 남 탓과 네 탓만 하고, 자기 책임성을 들여다보는 반성적 윤리의식이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네 탓을 하고 남 탓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따라만 하다 보니 좋은 것은 다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다 보면 자기는 기존 논리를 넘어서서 압도하는 사람으로 서지 못하고, 계속 분석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는 사람으로만 남는다. 학술 영역에서도 비판과 해석만이 넘치고 창의적 도전이 취약하다. 이 모든 문제점들은 바로 덕의 두께나 지성의 높이를 아직 갖추지 못해 생기는 일들이다.


지성의 근본적인 힘은 지식의 두께나 이론의 깊이가 결정하지 않고, 궁금증이나 호기심 같은 원초적인 힘이 결정한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후진국형 재난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후진국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우리 사회가 후진국형으로 재난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나라가 아직 후진국형 관리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후진국형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 한목소리로 우리의 안전 불감증을 지적한다. 이런 안전 불감증이 전형적인 후진국형 증세다.


지성적이면 질문을 하지만, 덜 지성적이면 고작 대답하는 일에 그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힘의 영역에 시선이 도달해 있지 않으면 피상적인 접근 이상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한다. 즉 ‘직職’을 갖는다. 그 사람은 그 ‘직’을 행하며 산다. 여기서 ‘살아간다’는 말은 ‘직’이라고 하는 하나의 역할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 ‘직’은 자신의 ‘업業’이 된다. ‘직’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업’은 사명 혹은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직업의 출현이다.


물 포럼에서 발생한 사고나, 아시안 게임의 성의 없는 운영이나, 대형 토목공사의 실패 사례 등등도 유관 책임자들이나 참여자들이 모두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각성이 사라져 예민함을 상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여러분은 지금 직장인인가? 아니면 직업인인가? 이것은 결국 내가 나로 존재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탁월한 사람은 논변에 빠지지 않는다. 논변에 빠진 사람은 탁월하지 않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이렇게 될 것 같은가요, 저렇게 될 것 같은가요?” 이런 식의 질문에는 자기 주도권이 양보되어 있다. 나는 그런 식의 질문보다는 “이렇게 해도 될까요?”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라는 식의 질문이 더 질문다워 보인다. 질문에는 반드시 ‘자기 관찰’과 ‘자기 의도’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질문을 할 때도 이 세계를 객관화시켜서 제3자 입장에서 말하기보다는 나의 입장을 부각시켜서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혹은 ‘나의 관점은 어떠하다’라는 의지를 선행시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실한 순간을 피하지 않고 대면한 사람에게 우주 대자연이 주는 선물이라고···, 자신에게 정말 진실하면 우주 대자연이 주는 선물이 있다고 말이다. 유일하게 한 번 가장 절실하게 진실해보았는데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났으니까.


문_어느 시점에 돌아가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나?   답_언제 다시 돌아가도 되겠느냐는 판단을 의식적으로 정확하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정확한 시점을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그런데 경험에서 얻은 단 하나 조건이 있다면 좌우지간 자신한테만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길이 될지는 모르지만 해석되지 않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큰 인간은 외부의 것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부족한지 더 나은지를 따지지 말라. 경쟁에 빠지지 말라. 오직 자신과만 경쟁하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지만 자세히 살펴라.


독립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론에 갇히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기가 배워서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체계보다 자기가 더 강하지 않는 한 자기는 드러나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창의력이나 돌파력도 생길 수 없다. 그때는 자기가 형편없어 보인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매우 약해지기 때문이다.


혁명이 완수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개인의 성숙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성숙된 개인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성숙의 높이와 깊이는 이미 그 개인을 넘어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격적으로 상당한 성숙에 이른 사람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동조하는 사람이 생긴다.

지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지적 세계를 참세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진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 체계는 모두 실재하는 세계를 비춘 것들이다. 그래서 주도권을 항상 세계에 두어야지 지식에 두어서는 안 된다. 지식에 주도권을 주는 한 고정된 지식 체계로 세계를 가두고 정지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지적 체계로 유동적 세계를 먹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질문과 대답을 교환하는 목적은 어떤 참된 결론에 이르거나 무엇에 관하여 진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일 뿐이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지식들 간의 진위를 따지는 일에서 일어난다기보다 그 사람만의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문제 있는 이 세계를 건너가보려는 적극적인 도전에서 일어난다. 이런 일에서는 치밀하고도 자세하게 벌이는 지적인 논증보다도 궁금증이나 호기심이랄지, 앞뒤 세세하게 재지 않는 배짱 같은 것들이 훨씬 더 큰 역할을 한다.  


이렇듯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신명한 통찰력이 생기고 성인의 마음이 덩달아 갖춰진다.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일을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해나가면 통찰력이나 성인 수준의 마음을 갖는 행운을 얻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선도력을 가지면 선진국은 선물처럼 저절로 된다. 정말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흙을 쌓고 산을 이루고 있는지, 정말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물을 모아 연못을 이루고 있는지, 정말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고 있는지, 그것만을 예민하게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  

카리스마가 없다는 것은 내면의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카리스마를 가지려고 애쓰지 말라. 차라리 자신이 이 지구라는 별에서 죽기 전에 하고 가야 하는 자신만의 사명을 발견하고 거기에 몰두하라. 그러면 월등한 내면이 갖춰지고, 그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향기가 우러나오는데, 그것이 카리스마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 활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